포럼주제

제24회 동서고금의 경전과 현자들의 상존배사상 - 곽도영 철학박사
글쓴이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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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존배 제24회 희망포럼이 5월 26일 아침 7시부터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있었다. 이날 초청강사인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외래교수 곽도영 박사는 100여 명의 상존배 회원들을 대상으로 동서고금의 경전과 현자들의 사상에 나타난 상호존중과 배려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행정자치부에서 후원하고 (주)미성아트 이병원 회장이 협찬한 이날 포럼에서의 곽 박사 강연 내용을 ‘아름다운 세상 상존배’ 편집국에서 요약 정리하였다. 최근 국내외 사정이 어수선하고, 경제가 매우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들은 막연히 잘 될 것 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점점 어려워 질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이야기를 좀 거슬러 올라가자면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 중에서‘곧 연합군들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 줄 거야.’라는 긍정적 사고를 한 사람들과 ‘우리는 이제 죽었어.’라고 부정적 생각한 사람 둘 중 어떤 쪽의 생존율이 더 높았을까요? 안타깝게도 이 둘은 모두 우문이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똑같이 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한 사람들의 생존율이 가장 높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미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이며 이를 정견(正見), 혹은 여실지견(如實之見)이라고 합니다. 이는 공자나 예수 같은 성인들의 가르침에도 나타남을 여러 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볼 때는 상대의 진면목을 여실지견하라는 것이 바로 상호존중과 배려의 기본입니다. 또 올바로 사람들을 본다함은 그 사람 내면의 신성(神性)과 불성(佛性)을 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상대에 대한 공경심과 존중과 배려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옵니다. 불교사상의 핵심인 지혜와 자비는 나와 네가 한 몸이라는 자아일체(自他一體)‧ 자아불이(自他不二)를 실천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공명조(共命鳥) 설화가 있습니다. 공명조는 머리는 둘에 몸은 하나뿐인 새를 말합니다. 둘은 평소 사이좋게 지내지만 맛있는 먹이만 보면 서로 먼저 먹으려고 싸웠습니다. 머리는 둘이지만 위장은 하나이니 누가 먹어도 마찬가지일 텐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한 놈이 독이 든 음식을 상대가 먹도록 계략을 꾸밉니다. 이로 인해 혼자서 먹을 것을 독차지할 것 같았지만 결국은 몸에 독이 퍼져 둘 다 죽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따라 죽는 공동체 생명을 '공명지조(共命之鳥)'라고 합니다. 자아일체(自他一體), 즉 자아불이(自他不二)의 정신을 대승불교 경전 유마경(惟摩經)에서는 유마거사의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전통사찰 입구에 있는 일주문(一柱門)과 불이문(不二門)도 자아일체(自他一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의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 따르면 모든 중생들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수행과 공덕을 닦고 쌓으면 누구나 성불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는 미래의 부처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불경보살은 사람들을 향해 미래의 부처님이라고 공경과 예배를 하였죠. 이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들은 자신에게 부처님이라고 하는 상불경보살에게 미친놈이라며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그래도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미래의 여래(如來)이자 부처님이다.’라고 공경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참된 실상을 바로 본 인간존중과 배려 사상이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존중과 배려를 입에 달고 살아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이는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죠. 부처님께서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산처럼 쌓아 놓고 맛있다 맛있다고 노래 불러도 내가 입으로 먹지 않으면 배부르지 않다고 능엄경에서 말씀하십니다. 당나라 시인이자 뛰어난 문장가이며 정치가인 백낙천이 항주 자사로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 지역에 도림선사라고 하는 이름난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자신의 학식과 총명함만을 믿고 고승을 시험하고자 찾아가 오만한 태도로 이렇게 묻습니다. “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법문 한 구절 듣고 싶어 왔소이다.” 이에 도림선사는 7불 통계라 하여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가르침인‘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는‘나쁜 짓을 하지 말고, 여러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평범한 말이었죠. 그러니 백락천은 비웃듯이 말합니다. “그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나 ‘삼척동자가 아는 사실을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라는 도선선사의 답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쓸모가 없습니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하지 않으면 진리의 길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함을 깨우친 백락천은 그 자리에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여 불법수행을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사찰에서 예불문에서 예배 대상이 되는 16성중(聖衆)의 한 분인 앙굴리 마라도 99명을 죽인 살인귀에서 부처님을 만나 ‘참 나’를 발현함으로써 새사람으로 태어나 16성중(聖衆)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순간 그 죄가 봄 눈 녹듯 사라진다는 것이 불교의 참회기도이고, 기독교의 회개, 즉 대전환(Conversion)입니다.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百劫積拾罪 一念頓湯盡 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 백겁 동안 쌓은 죄라도 단 일념(一念)에 모두 탕진시킬 수 있다. 마치 불씨가 마른 풀 더미를 태워버려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수 있듯, 백겁 동안에 지은 죄를 단 한 생각에 소멸시킬 수 있다. 이는 불교 경전 천수경의 한 구절입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인(仁)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예(禮)는 인간존중이고, 의(義)는 배려이며, 지(智)는 자타일체(自他一體)이고, 신(信)은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는 총체적인 태두리 즉 법(法)이라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중국에서 일찍이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살고 있는 이 땅을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의 손자 공빈이 지은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나오는 말이죠. 동이족은 풍속이 선량하여 길을 걸을 때 서로 양보하고, 밥을 먹을 때 맛있는 음식을 서로에게 미루며, 남녀가 따로 거처해 성이 문란하지 않은 동방의 예의바른 군자국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함축된 뜻 역시 동이족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논어에 보면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이렇게 여쭙니다.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해야 하는 한 마디의 말은 무엇일까요?” 이에 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소불욕(己所不欲)이면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이 말에 담긴 상호존중과 배려야말로 이 땅에 동방예의지국을 다시 세우는 정신개조운동이자 정신문화혁명으로 확산되어야 할 것입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지만 이를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가르려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선과 악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에 선을 드러내면 악이 사라지고 악을 드러내면 선이 숨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존중과 배려와 사랑으로 감싸준다면 모두가 불보살(佛菩薩)이요, 군자(君子)요, 로고스이며, 신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나온 고사성어 절영지회(絶纓之會)는 존중과 배려의 극치이자 나아가 이에 대한 아름다운 보은(報恩)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초나라 장왕(莊王)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궁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광풍으로 촛불이 꺼지자 누군가가 왕의 애첩 허희를 희롱하였습니다. 이에 허희는 그 사람의 모자 끈을 잡아당겨 왕에게 고했습니다. 그러나 장왕은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모자 끈을 풀라하고 마음껏 즐기도록 하였습니다. 승리 자축연을 피로 물들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날 허희를 희롱하고도 목숨을 부지한 신하 장웅(蔣雄)은 후일 전쟁에 패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왕을 구하는 큰 공을 세워 왕의 은혜에 보답하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대접 받고 싶거든 네가 먼저 대접하라.” 내가 완벽하지 않듯이 남도 그럴 수 있으니 남을 함부로 심판하거나 비난하려 들지 말고 존중과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다양한 이름들도 상대를 공경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2억 가톨릭 신자들은 소녀의 이름에 성모 마리아의 별칭을 붙여 성모마리아의 신앙과 덕행을 본받도록 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어 마돈나, 오페라 제목이자 집시 여주인공의 이름인 카르멘, 피겨스케이트 김연아 선수의 세례명 스텔라 등이 모두 성모 마리아를 뜻합니다. 이러한 세례명이야말로 상대를 존중하는 배려하는 공경문화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낭패(狼狽)라는 짐승을 알고 계신가요? 늑대처럼 생긴 전설속의 동물인데 한 마리는 앞다리만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뒷다리만 있어 항상 한 몸처럼 짝을 맞추지 않으면 걸을 수 없습니다. 낭패야말로 자타일체(自他一體)를 실천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자타일체(自他一體)는 바로 상호존중과 배려이겠죠. 그렇기에 존중과 배려는 인간 행복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행복의 문을 여는 것은 의외로 쉽고 간단합니다. 그것은 나를 상대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다섯 가지 幸福論을 말했습니다.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먹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財産)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容貌) 셋째,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名譽) 넷째, 겨루어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體力) 다섯째, 연설을 듣고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을 말솜씨(言辯) 뭔가 부족함을 탓하기에 앞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역시 같은 고대 그 리스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러스는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행복은 연속성이 있어야 하며, 지속 가능해야 한다. 둘째, 부작용이나 나와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셋째, 자기 스스로 절제가능 해야 한다. 넷째, 현재 쾌락이 이후 더 큰 고통과 불행을 가져 오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삶이어야 한다. 여섯째, 그렇기 위해선, 심플한 삶이어야 한다.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가난한 사람들)’에도 인간의 존엄성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계형 절도범 장발장이 수차례 감옥을 들락거리고, 어느 날 성당에서 또 은촛대를 훔쳐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미리엘 신부는 그 은촛대는 자기가 그에게 준 것이라는 용서와 배려의 말 한 마디를 함으로써 장발장은 회개해 사회사업가로 변신합니다. 옛날에 돈놀이를 하며 빌려준 돈을 한 푼도 떼이지 않아 큰 부자가 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비결을 묻자 과부는 돈을 빌리려고 온 사람에게 맛있는 콩과 맛없는 콩 을 각기 다른 그릇에 내놓은 다음, 맛없게 생긴 그릇의 콩은 자기가 먹고, 맛있어 보이는 콩은 주인 쪽으로 밀어놓는 사람에게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신용도 틀림없다는 것이죠. 구태여 동서고금의 경전과 성현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선조들은 이미 인간존중의 사상과 배려의 정신을 인격과 품성의 근본으로 보았고, 신뢰의 척도로 삼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상호존중과 배려를 생활화하여 세계정신문화개조운동에 앞장서고자 하는 분들이 모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의지를 다지는 뜻에서 함께 이렇게 외치며 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이 있을 땐 尊重을, 그 사람이 없을 땐 칭찬을, 그리고 그 사람이 힘들어 할 땐 配慮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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