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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10-13 2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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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교황은 방한 첫날인 814일 청와대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를 언급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교황의 말뜻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말에서 기자는 귀가 번쩍 열렸다.


정의는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 협력을 통해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하며, 상호 존중과 이해,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상호 존중을 교황이 언급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교황은 가는 곳마다 존중과 배려하는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치열한 삶을 살아오느라 존중과 배려를 잊고 살았던 국민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6일 이른 아침 기자는 무작정 서소문 순교성지로 가서 먼발치에서나마 교황을 볼 수 있었다.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마친 교황은 광화문 시복미사를 위해 바로 떠났지만 교황의 발자취를 아쉬움으로 더듬는 사람들과 함께 순교자 현양탑을 둘러보고 나서 광화문으로 갔다. 서소문로를 지나 대한문 앞에 이르니 경찰 통제가 시작되었다.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그리고 거의 두 달 가까이 지나 기자는 다시 광화문을 찾았다. 그날 숨죽이며 지켜보았던 벅찬 감동과 축복의 울림까지는 아니더라도 교황이 남긴 온화한 미소의 끝자락 정도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지하철 시청 앞 출구로 나가는 순간 기자의 낭만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시청에서 청계광장을 지나 세종로 사거리에 이르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온통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사나운 얼굴로 뱉어내는 증오의 목소리, 피켓과 현수막을 뒤덮은 자극적인 구호, 쇳소리를 내며 터질 듯이 울려대는 시위대의 스피커 소리 사이를 비집고 지나려니 울컥 짜증이 났다. 교황이 어루만져준 상처를 오히려 덧나게 하는 미욱함만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교황은 세월호 참사로 아파하는 우리 국민을 위로하고 치유하려 애썼다. 45일의 짧은 여정 동안 교황이 보여준 것은 인간 존중배려였다. 운전기사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숙소 주변의 경호 경찰들을 찾아 일일이 손을 잡아주는 섬김의 리더십과 세월호 참사 유족을 비롯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던 용산 참사 유가족들까지 만나 함께 아파하는 소통과 공감의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교황은 방한 얼마 전 아르헨티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행복 십계명을 제시했다.


자신의 방식으로 살되 타인의 삶도 존중하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라.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라. 소비주의에 빠지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라. 주말은 가족을 위해 보내라. 타인을 험담하지 말라. 타인의 종교를 개종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라. 전쟁을 지양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라. 젊은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라. 자연을 존중하고 돌보아라.


소박한 문구의 십계명에서 무려 4개가 타인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행복 십계명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은 결국 타인이었다. 나와 다른 남의 생각과 말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존중이고 배려일 것이다.


착잡한 심정으로 세종로 사거리에 도착했다. 충무공 동상 앞 허공에는 애드벌룬처럼 뛰어놓은 세월호가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관련 천막이 어수선했다. 하긴 아직도 10명의 실종자가 차갑고 캄캄한 바다 속에서 세찬 물살에 맞서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나마도 사치일 수 있다. 영화 명량은 떴건만 거북선은 보이지 않고 이순신의 리더십도 찾을 길이 없다. 우리 사회의 온갖 갈등이 민낯을 드러낸 광화문 거리에 있노라면 교황은 잠시 다녀간 손님일 뿐이었나.’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교황이 보여준 존중과 배려의 메시지는 분명 마법이 아니다. 교황이 던져준 화두를 이제는 우리가 풀어야 한다. 교황이 손 잡아줬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황이 간절히 기도하는 행복한 삶은 함께 하는 삶이다. ‘상호존중과 배려의 삶이다. 이제는 교황앓이를 멈추고 교황의 가르침을 귀하게 가꾸어야 한다. 정치지도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은 준엄하게 꾸짖되, 교황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설움과 한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이웃을 보살필 방법을 너나 할 것 없이 찾아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곧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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