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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5-22 18:36:47
  • 수정 2016-05-23 08: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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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시대에 교육의 중추 역할을 하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국립교육기관이었다. ()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말이고, ()는 학교이니 향교는 지방 학교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향교는 이미 고려 태조(太祖) 13(930) 평양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향교는 각 지방에 널리 설치되었고, 유교 교육은 물론이고 지방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에 들어와 조선왕조의 창업이념으로 자리 잡은 성리학(性理學)의 발달과 함께 향교도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행정단위마다 고루 1개소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모두 360개로 늘어나 지방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갖추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 재정이 극히 피폐해지면서 향교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사립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이 각지에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니 그 수는 전국에 걸쳐 378개소에 달하였다. 대부분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설립된 서원은 부분적으로 향교의 기능을 보완하고 향촌(鄕村) 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등 많은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격화되기 시작한 당쟁(黨爭)으로 인해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조선 말기 대원군(大院君)은 서원 철폐라는 극약 처방을 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는 외세(外勢)의 노골적인 침략을 당하게 되어 국운(國運)에 커다란 위기를 맞았고, 일제(日帝)는 유교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과 향교를 집중적으로 탄압하였다. 1910년 무력(武力)으로 한국을 합병(合倂)한 일제는 우리의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성균관을 폐지하고 지방 향교 역시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이때부터 성균관은 유교 경전을 교육하는 사설전문학원으로 전락하였으며, 향교 역시 유교의 성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 기능만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해방과 함께 성균관과 향교는 조직과 체계를 재정비하기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234개의 향교는 체제정비를 완료하였고, 유교와 지역사회 교화의 본산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특히 1980년대부터 향교는 청소년인성교육 현장교실등을 개설하는 등 사회교화(社會敎化)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




특히 고려 성종 6(987)에 창건된 진주향교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나라의 동량들을 수없이 배출한 영남인재의 요람답게 효자효부를 발굴 현창하여 효()사상과 경로효친사상을 앙양하는 한편, 서원, 문중, 기타 여러 유림단체와 연대하여 전통문화 보전과 청소년 인성교육에 앞장섬으로써 밝은 사회를 이룩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진주가 예로부터 호국 충절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진주향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기에 진주향교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시범향교, 경남교육청 지정 평생학습관,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선정한 평생학습계좌제 인정기관으로 우뚝 섰고, 2014년부터는 경남유교대학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이처럼 서부 경남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진주향교 심동섭 전교(典校 향교 책임자)는 유교사상의 근본이라 할 충효예(忠孝禮)의 현대적 실천과제가 바로 상호존중과 배려라는 생각에 정두근 총재에게 상존배 특강 요청을 하였다.



정 총재가 진주향교를 찾은 것은 지난 518() 오전이었다. 향교 교육관에는 서부경남지역의 유림(儒林) 100여명이 상존배 특강을 듣기 위해 모였다. 교육도시 진주답게 이곳 유림들은 초중고 교장선생님과 대학교수 등 교육계 인사들이 많았다.


정 총재는 고은 시인의 그 꽃이라는 시를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하였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산업화의 과정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고속 성장에 따른 부작용을 살피지 못했기에 갖가지 사회갈등이 심화되어 행복지수는 아직 후진국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을 한 정 총재는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충효예(忠孝禮)의 정신을 상호존중과 배려로 실천하는 일에 유림들께서 앞장 서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조선시대에 박세무는 천자문을 막 익힌 학동들이 공부할 책 동몽선습(童蒙先習)’ 첫머리에서 天地之間萬物之中(천지지간만물지중)惟人(유인)最貴(최귀)하였듯이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귀하게 여겨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出門如見大賓(출문여견대빈)’이라 하여 문을 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큰 손님 맞이하듯이 하라고 하셨으니, 이 또한 상호존중과 배려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림들은 상호존중과 배려의 실천과제로 우선 존중어 사용을 제안하는 정 총재의 말에 많은 공감을 표했다. 옛날 선비들은 부인에게 경어를 사용했고, 자식도 결혼하면 존중어를 사용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림들이기에 쉽게 공감대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정 총재가 군에서 선후임 간에 존중어를 사용하도록 해 병영의 폭력문화를 청산한 사례를 소개할 때는 힘찬 박수가 나오기도 하였다.



한 시간 반 가까이 이어진 결코 짧지 않은 강연이었지만 유림들은 대부분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세의 흐트러짐 없이 정 총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하였다. 강연이 끝난 후에는 청소년 인성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싶다며 정 총재 강의자료를 요청하는 전직 교장선생님도 계셨다. 또 국립 경남과학기술대 고영옥 명예교수는 상존배 진주지회를 설립해 상존배 운동으로 진주를 충절의 고장답게 인간중심 정신문화의 진원지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였다. 이에 정 총재는 고 교수를 모시고 이강석 총재조직특보, 정기민 진주향교 사무국장, 채재일 상존배 사무총장 등과 함께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는 오랜 시간동안 상존배 진주지회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진주향교 강연 후 임진왜란 당시 북관대첩의 주인공인 충의공 정문부 선생의 얼이 깃든 가호서원(佳湖書院)과 사당 충의사(忠義祠)를 찾아 서원 논어학교 정기민 교장의 안내를 받는 정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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