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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8-02 20:30:47
  • 수정 2016-08-02 21: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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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1일 ‘국회의원 특권,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정두근 총재는 이 자리에서 도법(道法) 스님과 10여년 만에 반가운 재회를 하였다. 스님은 토론을 주관한 배려문화포럼 공동대표로 정 총재가 육군훈련소장으로 재직하며 상존배 병영문화운동을 펼칠 당시 훈련소를 방문했던 인연이 있다. 토론회를 마치자 스님과 함께 배려문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용숙 아나기(아줌마는 나라의 기둥) 대표는 정 총재에게 도법 스님이 회주(會主 사찰 창건주이거나 큰스님)로 있는 남원 실상사(實相寺) 방문을 즉석 제안하였다. 그리고 열흘 뒤인 30일에 1박 2일 여정으로 정 총재와 김용숙 대표, 채재일 사무총장이 실상사를 방문하였다.


실상사는 지리산 봉우리들로 에워 쌓인 남원과 함양 경계의 분지에 마치 연꽃 모양으로 가부좌를 틀고 자리 잡은 평지가람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니 공후 닮은 악기를 켜거나 다소 장난기 어린 표정의 사천왕이 중생을 맞이해 이곳이 생명평화의 도량임을 실감케 하였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대구에서 일찌감치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정광진 뮤지컬 감독이 반갑게 인사하였다. 정 감독은 불교문화 콘텐츠 제작과 공연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불교극 전문연출가이다. 처소에서 막 나온 도법 스님 역시 동자승 같은 해맑은 미소로 일행을 맞이하였다. 다실(茶室)에서 손수 차를 따라주며 안부를 묻는 스님의 청아한 목소리에는 차향만큼이나 한없이 그윽한 향과 살가움이 배어나 여독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두어 시간동안 차담(茶啖)을 나누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스님과 함께 경내 산책을 해보니 실상사에는 천년고찰다운 고풍스러움과 현대예술가들의 지리산 프로젝트 활동에 따른 현대적 감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미타불을 모신 주()법당 보광전은 아담하고 단청도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정겨움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약사전의 철조여래좌상은 무쇠 4천근으로 주조하였기에 높이가 2.66미터에 이르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이 무쇠불은 정면으로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보다는 그 너머 일직선상에 있는 일본 후지산 기운을 온몸으로 막고 있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치밀한 배치로 인해 실상사를 가리켜 일본을 경계하는 호국사찰이라고도 한다.




약사전 철불 뒷벽의 탱화(幀畵)는 주로 수미산(고대인도의 불교우주관에서 세계중심으로 여기는 상상의 산)을 그린 다른 탱화와 달리 지리산 자락과 논이 에워싼 실상사 전경을 담고 있다. 지리산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호신 화백이 지리산이 담고 있는 생명평화적 가치, 역사적 가치, 종교적 가치와 함께 우리 사회의 아픔까지 녹여낸 탱화라고 한다. 우리의 삶에서는 지리산이 곧 수미산이라는 도법 스님의 뜻도 함께 묻어나는 탱화였다. 이렇듯 실상사는 국보 삼층석탑과 철조여래좌상을 비롯한 11점의 보물을 간직한 고찰이면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단까지 경내에 조성해놓았으니, 생명존중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배려의 가치가 살아있는 절이라 하겠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기도단은 범종 옆에 한길 높이로 도드라지게 조성한 잔디마당으로 세월호 희생자 수 만큼인 노란 깃발 304개를 꽂아놓고 있었다. 경내 산책의 마지막 걸음을 이 기도단으로 옮긴 도법 스님은 정 총재 일행과 둘러앉아 생명과 평화, 존중과 배려로 바꾸어야 할 세상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어둠이 깔려 깃발 옆에 세워 놓은 태양열 등 304개에도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등불은 마침내 잔디밭 곳곳에서 빛났고, 반딧불이 같은 영롱한 기운이 기도단을 휘감았다. 대화는 점점 삶의 근원을 탐구하는 심오한 경지까지 넘나들며 밤이라도 지새울 기세로 이어졌으나, 새벽예불을 위해 잠시 눈을 붙여야겠기에 아쉬움을 털고 일어서야 했다. 그 순간, 밤하늘의 별들이 세월호 영령들에게 쏟아져 내렸고, 불빛을 머금은 영령들은 다시 하늘로 올라 별이 되어 실상사를 둥글게 에워싼 지리산 자락 검푸른 골짜기에 뜨거운 눈물의 빛을 흩뿌렸다.



너른 호수에 돛배처럼 떠있는 실상사 선방에 누워 이런저런 상념에 따른 감흥과 문 밖 풀벌레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객창감으로 꿈결을 오가다가 새벽 430분 법당 앞의 목탁소리와 함께 시작한 예불의 경외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자 도법 스님은 일행들을 다시 다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우뚝우뚝 솟은 산 그림자를 걷어내고 떠오른 해가 열기를 더하며 중천에 이를 때까지 종교 윤리와 삶의 정의(正義), 생명평화운동과 존중, 화쟁과 배려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독백하듯, 때로는 격정적으로 토로하였다. 스님이면서 실천운동가의 삶에 몸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때때로 벽에 부딪쳐야 하는 고뇌의 속내를 언뜻언뜻 비치기도 하였다. 이틀에 걸친 대화의 주요 내용을 Q&A 형식으로 정리해보았다.




Q : 스님께서 육군훈련소를 방문하신 것이 2006년인데 그때가 생명평화탁발순례 중이셨죠?

 

A : . 2004년 봄부터 2008년 겨울까지 5년 동안 12천 킬로미터를 걷고 8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5백회에 이르는 강연을 하는 탁발순례(托鉢巡禮 출가수행자가 무소유계를 실천하기 위해 걸식으로 의식을 해결하는 수행)를 하였습니다.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자 전국 방방곡곡을 걸어서 순례했던 것이죠.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이기에 우리의 길이 옳은가, 아닌가를 생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었습니다.

 

Q : 스님께서 제창하신 생명평화운동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내 안에 내 생명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그 삶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지식과 믿음을 의심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요?

 

A : 바로 그 상식적인 믿음이 아무런 근거 없는 허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은 절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잉태부터 태어남과 삶에 이르기까지 어디까지가 내 생명이고, 어디부터가 너의 생명인지 한계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란 그물코처럼 온 우주가 참여하여 이루어진 총체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죠. 자타불일불이(自他不一不二), 즉 나는 너이면서 너는 나이니 우주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우주이니 생명은 영원성과 무한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속성 때문에 생명은 국가나 종교, 이념 등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렇기에 생명살림과 평화살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Q : 평화살림을 말씀하셨는데요, 여기저기서 숱하게 들려오는 평화란 말이 왠지 공허하고 떠다니는 말처럼 실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A : 누구나 살고자 하는 삶이면서 살아야 할 삶이 평화라면 우선 그 조건부터 만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조건을 만들면 평화는 따라오는 것이죠. 멀리 히말라야까지 쫓아가 평화를 찾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감각적인 평화일 뿐입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만든 조건이 아니기에 고향으로 돌아오면 다시 히말라야만을 그리워하는 불행에 빠지죠.

 

Q : 그렇다면 평화의 조건은 대체 무엇입니까? 물론 평화란 총체적 조건의 산물이겠지만 특히 스님께서 강조하시는 주체적 조건을 중심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 : 생명의 실상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존재하는 것이기에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체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 평화 실현의 첫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관계론적 관점에서 너와 나, 나와 사회, 나와 자연 등을 이해하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늘 주체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주체적 조건이라면 평정심 유지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 부드러움, 여유로움, 안정됨으로 집중력을 강화해야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밖에도 생리적 조건, 사회적 조건, 자연환경적 조건 등 평화의 조건을 일일이 나열하려면 끝이 없겠죠.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을 한마디로 단순화시키면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움뿐이라고 하겠습니다.

 




Q :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움뿐이라고 하시니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합니다. 이 말씀은 이해보다 직관적 깨달음의 문제인 듯하니 범부들로서는 시간을 갖고 곰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전에 동양 인문학의 출발이라 할 관계론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불교적 관점을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A : 관계론은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는 만물의 인과관계와 상호의존성이 여기에 담겨 있죠. 이러한 존재의 실상은 이미 고대 인도의 베다신화에 나옵니다. 하늘의 제왕으로 동방 수호신인 인드라(Indra) 궁전에는 무수한 구슬로 이루어진 방이 있습니다. 구슬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주는 존재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는 생명평화와 어울림의 삶을 인드라망 무늬로 표현하였습니다. 연기적 세계관과 정신을 눈으로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각화한 그림이죠. 이 무늬를 보면 하늘의 해와 달 아래로 식물과 새와 물고기와 네발 달린 동물과 사람이 한 줄기에 엮여 있습니다. 공존과 균형과 조화라는 우주삼라만상의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우리말로 그물코라고 합니다. 그물코를 보면 모두가 촘촘히 이어져 있지 않습니까?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라는 진리 속에서 참 나를 찾아야 합니다. 이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기에 불교뿐 아니라 범 종교와 시민사회단체 등에서도 실천철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Q : 그래서 실상사 법당 안팎과 공양간, 모든 책자, 이 찻방에서도 인드라망 문양을 볼 수 있는 것이군요. 스님께서는 작년 조계종 화쟁위원장 자격으로 조계사에 피신한 한상균 전국민주노총위원장 사태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언론의 주목받으셨습니다. 화쟁(和諍) 역시 인드라망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A : 물론이죠. 화쟁은 우리나라 불교의 저변에 깔린 핵심사상입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삼국통일의 이념으로 일심화쟁사상(一心和諍思想)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다양성 속에서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입니다. 모든 존재는 삶과 죽음이 처한 상황이 달라도 하나의 큰 배를 같이 타고 가는 운명공동체이기에 모두가 평등한 삶의 여행을 즐겨야 합니다.




Q : 결례일 수도 있는 민감한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30여 년 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저지르고 천주교 원주교구로 피신한 젊은이들을 최기식 신부가 16개월가량 보호하다가 자수시킨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당시 수사당국은 최기식 신부를 구속했고, 법원은 실형선고까지 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직자에게 실정법이 우선이냐 종교법이 우선이냐 하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이 논란과 무관하게 하나된 목소리로 최기식 신부의 입장을 옹호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조계종에서는 한상균 위원장의 신병 문제를 두고 하나된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위원장과 수사당국 사이에서 화쟁의 목소리를 높인 스님을 비판하는 말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조계종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봉은사 사태에 이어 용주사 주지 은처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며칠 전에는 파란 눈의 스님이라며 대중적 인기가 높은 현각 스님이 조계종을 비판하며 탈종 선언을 하는 파문이 일었습니다. 조계종이 위기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A : 부끄럽고 자성해야 할 일들이죠. 조계종이 대중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종단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종단 운영에 따른 현실적 어려움은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오신다 해도 종단 안팎에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들을 단숨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종단에서는 화쟁위원회와 위기극복모임인 결사추진본부’, 전국 교구본사와 사부대중이 함께 종단 백년대계를 수립하자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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