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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1-19 21:11:31
  • 수정 2014-01-19 21: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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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익권

민족문화컨텐츠연구원 석좌교수 

 정조대왕기념사업회 이사 

()상호존중과 배려운동본부 이사 

 

 

   갑오년(甲午年) 새해가 밝았다. 갑오(甲午)하면 우리는 역사교과서에 자주 등장했던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경장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면 육십갑자(六十甲子)가 두 번 돌아 올해로 120주년이 되는 셈이다. 역사는 엄밀히 말하자면 승자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일부 학자들의 가설로만 머물렀던 역사의 뒷이야기가 정보공개형식을 통해 세상 속으로 뛰쳐나오면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는다. 1910년에 행해진 경술국치 즉 강제합병의 이면을 파헤쳐, 우리의 역사 상식을 완전히 뒤흔든 책이 2010년 미국에서 발간된바 있다. 제임스 브래들리가 지은 임페리얼 크루즈(Imperial Cruise)는 후일 노벨평화상까지 수상(1906)했던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끔 만든 놀라운 책이다.

   저자는 러일전쟁(1904) 후 미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단장으로 하는 1905년 아시아 순방단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당시 루스벨트가 추구한 아시아정책의 실체를 파헤쳐 나간다. 80여명의 이 사절단은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고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을 거치는 긴 여정이었다. 그 일행 중엔 루스벨트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와 약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제국의 고종과 순종은 미국 대통령의 딸이 자국을 방문하는 것은 분명 큰 외교적인 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녀를 국빈의 신분으로 모셨다. 그런데 정작 대한제국(조선)을 찾은 그녀는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에 와서 같이 온 인사들과 약혼자와 함께 무덤의 말()석물에 올라타는 등 어처구니없는 결례와 실수를 범한다. 이후 한미관계의 어두운 그림자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의 저자는 이들의 핵심 임무가 바로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 즉 미일(美日) 밀약을 성사시키는 것이었음을 밝힌다.

   이른바 가쓰라 태프트밀약이 그것이다. 각서에 따르면 일본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물론 밀약의 존재는 루스벨트가 사망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두 달 뒤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헤어졌다. 태프트 일행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앨리스 일행은 베이징을 거쳐 한국을 방문 일정을 계속 진행한 끝에 마침내 919일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요지의 포츠머스조약이 95일에 체결된 날로부터 2주일 뒤였다. 일본은 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상태였고 한반도 침략에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두 달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순방단은 100일 동안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을 돌며 제국주의의 추악한 비밀임무를 수행한 셈이었다.

  한국의 식민지화는 루스벨트와 일본천황, 가쓰라 일본총리,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이 협력해서 만든 제국주의의 추악하고 슬픈 산물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이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예를 들어 한국민의 은인으로 불리는 제중원(濟衆院) 의사 알렌 공사는 루스벨트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기 위해 보낸 척후병이라는 사실도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루스벨트는 한국을 강점하도록 일본을 부추겨 일본의 아시아 지배야욕에 길을 터 주었다. 저자는 루스벨트의 이러한 오판은 역사의 부메랑이 되어 결국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태평양전쟁을 불러왔고, 중국 공산혁명,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면서 루스벨트가 추구했던 정책을 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루스벨트)가 휘두른 몽둥이가 남긴 상처들은 태평양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긴장사태들을 일으킨 불씨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가 말하는 동양평화(東洋平和)’는 주변 국가들을 침탈하여 자국(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100여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약체 조선을 두고 벌였던 미일 두 제국주의의 추악한 밀거래설은 이제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역사의 반복일까? 지난해 연말, 중국이 설정한 방공식별구역을 놓고 마침 미일(美日)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베정권을 내세워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일본은 이 기회에 평화헌법을 고쳐 재무장을 단행하려 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각 한국만 빼놓고 또 강대국 간에 다른 밀약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양한 경로로 정보를 수집하고 외교수완을 발휘하는 등 고도의 집중력 필요한 때이다.

   한반도 주변강국들의 이해관계와 복잡한 셈법을 넘어, 남북한 당사자 간에는 누가 뭐래도 통일은 대박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이 분단과 이념적 냉전의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야 한다. 갑오년을 맞아 하루 속히 적대적 대결과 경쟁을 넘어서서 상호간에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가 구측축되어 가길 간절히 희망해 본다. 그래야만 비로소 통일논의도 가능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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