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5-01-25 00:13:43
  • 수정 2015-01-25 00:16:19
기사수정


추사(秋史 1786~1856)의 증조부는 조선 영조의 사위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제 모두가 학문이 뛰어나 큰 벼슬을 하였다. 이런 명문가에서 자란 추사는 어린 시절부터 시(), 글씨(), 그림() 공부에 몰두하며 탁월한 재능을 키웠다. 그의 학문은 경학, 문자학, 지리학, 천문학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이 금기로 여겼던 불교에까지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세도가 안동 김씨의 정치극에 휘말려 55살부터 9년 동안 제주도 유배생활을 한다. 그러한 추사에게 중국에서 어렵게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이 있었다. 누구나 권력자에게 줄을 대고 잘 보이려고 하다 불리하면 떠나버리는 것이 세상 이치이건만 그는 추사에게 귀한 책을 보내 주었다. 추사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상황이었기에 자칫하면 같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그 귀한 책들을 다른 권력자에게 바쳤더라면 출세가도를 달릴 수도 있었음에도 이상적은 스승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그런데 그 이면에 추사의 존중과 배려가 있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추사는 남의 사정을 먼저 생각하고 늘 배려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명문가의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중인들과 서슴없이 교류한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에 현판을 써주는가 하면 통역관이었던 이상적과 같은 중인들을 신분을 뛰어넘어 존중하였다. 고답적인 신분질서보다 인간을 먼저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았기에 추사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인정했고 끝까지 의를 다했다.


추사가 이상적에 대한 보답으로 완성한 작품이 바로 국보 180세한도(歲寒圖)’이다. 우리나라 회화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세한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발문(跋文)을 함께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사실 추사는 화공(畵工)이 아니었기에 그림이 서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한도는 기교가 아닌 선비의 지조와 절개, 이상적 간의 우정과 신뢰가 오롯이 담겨 있기에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이 발문을 읽노라면 추사와 이상적이 나눈 존중과 배려는 석가모니와 제자 마하가섭이 마음으로 진리를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경지 못지않아 가슴이 뭉클해진다.



작년은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170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추사기념사업회에서는 추사동상건립을 추진하였고, 7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10월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 11월 추사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경기 과천의 과지초당에 이어 12월에는 제주 서귀포시 추사유배지에까지 동상제막을 함으로써 추사의 부활을 꿈꾸는 의미 있는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동상은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조각한 김영원 홍익대 명예교수가 제작하였다.


이 큰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까지 한 추사기념사업회 최종수 회장은 (사)상호존중과 배려운동본부 고문이기도 하다. 또한 세 차례의 동상제막식 모두 추사의 예술혼을 무용으로 승화시킨 한뫼예술단 공연이 있었는데 이 예술단을 이끄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오은명 단장 역시 평소 상호존중과 배려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상존배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렇기에 과지초당 동상 제막식에는 상존배 정두근 총재가 직접 찾아가 최 회장의 노고와 열정에 경의를 표하였고, 제주 유배지 동상제막식에는 상존배신문 채재일 편집인이 동행 취재를 하며 추사에게서 상호존중과 배려의 정신을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충남 예산 추사 고택에 세운 동상


경기 과천 과지초당에 세운 동상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 유배지에 세운 동상

단지 아쉬운 것은 제주 유배지에 건립한 추사 동상의 위치였다. 동상은 추사 선생이 유배지 앞뜰을 거닐면서 상념에 잠기는 모습을 재현하여 추사의 21세기 부활을 형상화하였는데 동상 위치가 유배지가 아닌 인근 저수지 앞이었다. 강태공에게나 어울림직한 자리에 추사가 자리 잡고 있어 뜻있는 주민과 방문객들이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처음에는 유배지 초가를 막 나선 자리에 세웠었으나 문화재청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역사유적지에 새로운 건조물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담당 부서의 경직된 사고가 추사를 또 다시 유배시켰다는 씁쓸함을 안고 기자는 제주에서 돌아와야 했다. 단지 비행기에서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며 이근배 시인의 헌시 한 구절에 위안을 삼아 추사 선생이 편안히 당신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칠십년 열 틀의 벼루를 바닥낸


그 먹물이 남해바다를 물들이고


천 자루 붓을 닳도록 쓰신 한지가


이 나라 산천을 백설로 덮어오고 있습니다.


완당 선생이시여!


이제 붓과 종이를 들고 오셨으니


이 나라 만대의 융성과


이 겨레 무궁한 복락을 구현하는


새 세한도를 그려주소서.


 


 


채재일 기자


cajail@naver.com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mrrcc.org/news/view.php?idx=313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상존배 바로가기메뉴 공지사항바로가기 교육신청 언론보도 로고송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