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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6-20 09:59:38
  • 수정 2015-07-08 22: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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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존배 고문으로 상존배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김동욱 전 국회의원이 회장으로 있는 21세기 경영인클럽 조찬회가 619일 아침 730분부터 9시까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있었다. 이날 초청연사는 한국현대사의 산증인으로 현재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으로 있는 백영훈 박사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첫 번째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백영훈 원장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와 박정희 전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알 필요가 있다. 1963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른 박 대통령이 중앙대 교수로 있던 백 원장을 찾았다. 서독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 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 당초 5만 달러를 주고 노스웨스트 에어라인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압력을 넣어 노스웨스트에서 예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이었다. 독일 방문 불과 열흘 전이었다. 백 원장은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만났다.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


독일 관료들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며칠 후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여객기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할 테니 이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했다. 대통령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타는 비행기를 얻어 타고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았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1964125일 서독에 도착한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어서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고, 백 원장을 이 말을 통역하며 대통령과 함께 울었다. 묵묵히 듣던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깔았다. 그 다음엔 자동차가 필요하다. 다녀야 한다. 독일의 국민차 비틀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은인과 같은 존재이다. 이날 그는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담보가 필요 없는 25000만 마르크(당시 5000만 달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서독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박 대통령은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자동차를 세우더니 차에서 내려 무릎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문전 박대당한다. 미국 측에서 보기에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조짐이 일고 있었다. 실망만 안고 돌아온 박 의장은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 분단국가의 아픔과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서독을 보며 박 의장은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라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1961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독일 경제학 박사 백 원장을 찾아내었다. 백 원장은 사절단의 공식 통역관으로 합류하였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 그렇지만 은사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이에 백 원장은 매일 아침 6시 교수 집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경재장관 좀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 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는 차관과의 약속을 잡아주었다. 196112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안 되었던 상황이니 실로 이는 엄청난 성과였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사절단은 귀국하고 백 원장은 뒷마무리를 위해 독일에 남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은행은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시 백 원장은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지급보증 서 주는 데가 없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함께 박사과정 공부를 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당시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미트 과장은 대뜸 백 원장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실업자가 많지 않으냐?’고 묻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고, 사람을 모집해보니 광부 47천 명, 간호사 27천명이 지원했다.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하는 고임금을 받고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선발 자격을 고졸 학력에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졸자들까지 무조건 신청했다. 탄광 갱도조차 구경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 그러다보니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 졸업자였다. 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다들 관심이 높았던 사안이었던지라 노동부는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 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을 정도였다.


드디어 196312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123명이 도착했고, 이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 크게 못 미친 것은 물론 북한에게도 뒤져 있는 상황이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모두 7932, 간호사는 1226명이다. 이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 은행을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은행이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백 원장이 처음 독일 유학을 떠날 때 국비유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주머니에는 단돈 10달러뿐이었다고 한다. 여의도비행장, 지금의 63빌딩 자리에서 홍콩으로 가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몇 차례 갈아타기를 거듭한 끝에 사흘만에 서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주는 기내식이 돈 내야 하는 것인 줄 알고, 모두 사양하고 홍콩에서 1달러를 주고 산 바나나 한 보따리를 들고 이것만 먹으며 버텼다. 이러던 대한민국이 오늘처럼 경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힘을 백 원장은 세계 여러 석학들의 말을 종합해 이렇게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가 우리 문화의 독창성이다. 가난의 한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한국 정신, 즉 불가능을 모르는 의지와 신바람의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를 선진국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이 인구의 70%나 되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문화의 독창성을 외국인들은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둘째는 한국 어머니들의 힘이 갖고 있는 국가경쟁력이다. 이는 막상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외국 학자들이 부러워하는 힘이다. 가족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화합의 힘과 부족한 자식을 끌어안는 포용력의 리더십,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희생정신이 한국의 발전을 이끈 중요한 힘이었다.


셋째는 우리의 교육열이다. 소득의 35.7%를 교육비로 지출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인구비례 대학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이처럼 우수한 인적 자원이 있었기에 선진국의 어떠한 문화와 과학기술이라도 단시간에 받아들이고 익혀 우리 상품으로 재창조한 다음 세계시장에 들고 나가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는 한국의 기업가 정신이다. 일단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도전하는 기업가의 열정과 활력은 단연 세계 최고이다. 현재 전 세계에 나가 있는 우리나라 교민은 약 75만 명이다. 인국의 15%가 나라 밖으로 나간 유일한 민족이다. 그리고 이 한국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 특유의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다섯째는 조직과 국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충성심이다. 징병제도를 시행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군에서 확고한 국가관을 정립하였기에 젊은이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을 갖고 맨주먹으로 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2만 달러에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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