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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3-09-26 12:13:50
  • 수정 2013-10-13 21: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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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의 혜화동 성당에서 동성고등학교까지 100m 남짓한 인도는 매주 일요일 필리핀 거리로 변신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일요일이면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혜화동 성당 타갈로그어(필리핀어)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모이기 때문이다. 이에 필리핀 거리는 자연스럽게 필리핀 장터기능도 갖추게 되었다. 이곳에 필리핀 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부터이다. 그 전에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타갈로그어 미사를 처음 시작한 서울 광진구 자양동 성당에 모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필리핀 신부님이 새로 부임한 혜화동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의 필리핀장터를 형성하였다. 오전 10시경에 서는 장은 해질녘이 되어야 파시한다. 하루 중 가장 활기찬 시간은 오후 130분에 시작하는 혜화동 성당 타갈로그어 미사 전후이다

 

이곳에는 온갖 생활용품은 물론, 열대 과일 망고부터 과일의 여왕이라는 두리안까지 있다. 바나나 꼬치구이와 발롯(Balut)은 이곳 아니면 맛보기 어렵다. 특히 발롯은 두 주 정도 된 오리알을 삶은 것으로 껍질을 벗기면 알이 아닌 부화 직전의 새끼오리가 털이 보송보송한 채 웅크리고 있어 처음 보는 사람을 기겁하게 한다. 그렇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발롯이 관절염과 당뇨에 좋은 자양강장제라며 그 효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기자가 차마 먹지 못하고 망설이자 지켜보던 주인 리타(36)씨는 필리핀 사람들은 발롯을 영양제보다 좋은 식품으로 여긴다며 맥주와 함께 먹어보라고 재차 권했다. 한국생활 7년째라는데 생각보다 능숙한 한국어로 필리핀 맥주 산 미구엘자랑을 했다. 100년이 훨씬 넘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로 서울 술집에서는 한 병에 만 원 가까이 받지만 이곳에서는 3천 원이라며 유혹하는 장사 수완도 제법이었다. 기자가 웃기만 하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정어리 통조림을 가리켰다. 청소년 영양식으로 최고인데 한국 마트에 없으니까 한 통에 천 원씩 사가라는 말을 기자는 결국 외면하지 못했다.

검은 비닐에 싸준 정어리 통조림 몇 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가장 북적이는 곳은 필리핀 음식을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우리나라 장터에서도 먹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듯이 간이식탁에는 오전 11시가 안 됐음에도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흡족한 표정으로 음식 맛을 보고 있었다. 어느 민족이나 고국의 향수를 달래려면 역시 음식이 최고인 듯 했다. 더운 지방 사람들이라 그런지 튀김과 구이 요리가 많았다. 간이식당 다음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은 국제전화카드와 선불요금제 휴대전화를 파는 곳이었다. 고국에 있는 가족들 목소리를 들으며 타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듯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필리핀장터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에게 단순히 고향 음식과 생필품을 교환하는 공간을 뛰어넘어 타국생활의 애환과 향수병을 치유하는 마당이며 일자리 정보를 나누는 소통의 광장이었다



일요일에도 문 여는 은행

혜화동 필리핀장터에서 길 하나 건너면 일요일에도 영업하는 은행이 있다. 내국인 업무는 취급하지 않고 오로지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송금과 환전, 입출금 서비스만 하는데도 하루 종일 바쁜 은행이다. 이 은행은 20067월부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요일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주노동자들은 평일에 은행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혜화동 지점에서는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영업하고 있었다. 필리핀은 해외 근로자들이 보내는 송금액이 약 200억불 이상으로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이 금액은 필리핀 외환보유고의 약 40%, GDP10%에 이른다. 이러한 송금액이 필리핀 내수 소비시장 기반이 되어 필리핀 경제성장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지난날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1960년대 독일 파견 간호사와 광부의 송금, 1970년대 베트남 파병 용사와 근로자들의 송금, 1980년대 중동 건설 근로자들의 송금으로 경제개발 종자돈을 만들었던 모습을 오늘날 우리는 혜화동에서 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이주해 살고 있는 필리핀 사람은 5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3D업종에서 근무한다. 어려운 근무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뿌리 깊은 신앙심과 낙천적 성격으로 외롭고 힘든 생활을 이겨내고 있다. 그렇기에 필리핀 장터를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해맑다. 누구에게나 밝게 웃으며 마부하이(Mabuhay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마간다(Maganda 아름답습니다. 좋습니다.)’로 말을 건넨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이 인사에서 물씬 풍겨난다. 이미 다문화 사회가 상당히 진행된 우리나라에서 필리핀 장터는 또 다른 색깔의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법과 문화의 갈등, 무허가 노점상

그러나 필리핀 장터의 미래는 불안정하다. 관할 관청인 종로구청에서 필리핀장터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사실 필리핀장터에 나온 상인들은 모두 무허가 노점상이기에 법의 잣대로 보자면 분명 단속 대상이다. 종로구청은 장터 상인들이 인도와 차도를 점령해 시민들의 통행에 불편을 미치는 것은 물론 안전사고의 우려도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주변지역 주민들도 소음, 통행불편 등의 이유로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대학로의 소음과 통행불편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이러한 민원의 속내에 혹시 가난한 필리핀 이주노동자들로 인해 집값 하락 우려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반면에 필리핀장터 구경 나온 사람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이국적 분위기의 장터를 만난다는 것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인천에서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는 황중민(50)씨 가족이 다문화 장터를 문화상품화 하여 다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지혜로운 정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예외 없이 동의하였다. 어쨌든 필리핀 장터는 불법 노점상이라는 꼬리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며 구청과 상인들 모두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법 이전에 상호 존중과 배려 정신을 바탕으로 다문화 사회라는 큰 틀 속에서의 해법 찾기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다문화 모델 찾기

미국, 캐나다, 호주처럼 오래 전부터 다문화를 겪어온 나라들이 있지만 그 사례를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다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다문화 모델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비교적 단일한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많은 이주민들이 취업이나 결혼을 통해 들어왔기에 그들의 거주지역이 공단이나 농촌 등에 편중되어 있다. 이러한 특수 상황 때문에 우리는 다른 다문화 사회의 사례를 검토하되 한국적인 상황에 맞는 모델을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

다문화 사회를 비유하는 모델로는 우산 용광로 모델을 들 수 있다. 용광로에 들어간 여러 광석은 녹고 섞여 한 덩어리가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 용광로에 들어간 구리, 주석, , 아연 등은 서로 어울려 단단한 금속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녹이 슬지 않는 금속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한민족은 물론 이주 노동자, 이주 여성과 그 자녀들 모두가 용광로에 들어가 함께 녹아들고 섞여 더 강하고 쓸모 있는 한 덩어리의 쇠붙이로 거듭나며 불순물은 제거할 수 있다.

다음으로 샐러드 그릇 모델이 있다. 샐러드는 생야채나 과일을 주재료로 하여 마요네즈나 프렌치 드레싱 따위의 소스로 버무린 음식이다. 샐러드 속에 들어 있는 생야채나 과일은 그 본연의 모습, , 향을 유지하며 소스와 어우러져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재탄생한다. ‘한민족은 물론 이주 노동자, 이주 여성과 그 자녀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각각의 정체성을 공고히 유지하면서 공존한다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수 대접 모델이다. 국수는 갖가지 재료로 우려 낸 국물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삶아 넣고 고명을 얹은 음식이다. 쫄깃한 국수의 씹는 맛, 국물의 깊고 시원한 맛이 주를 이루고 여기에 갖가지 고명이 얹혀 입맛을 돋운다. ‘한민족은 국수와 국물이 되어 주류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이주민은 색다른 맛을 더해주는 고명이 되어 자존감이 살아 있는 비주류로서 공존하는 가운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19대 국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국회의원 중 한명이 이자스민 의원이다. 필리핀계 이주민인 그녀의 국회 입성은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더구나 1월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국내 결혼이민자는 총 21만 명으로 그 중 필리핀 여성이 5.7%를 차지한다고 한다. 다문화 모델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족들이 하루속히 정체성을 찾고 우리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일은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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