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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9-21 13:49:55
  • 수정 2015-09-21 14: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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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7일 아침 7시부터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상존배 제20회 희망포럼이 있었다. 이날 초청연사는 새누리당 최고위원인 김을동 의원이었다. 1945년 해방둥이인 김 의원은 정치인 이전에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손녀로, 배우 송일국의 어머니로, 요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삼둥이 대한민국만세의 할머니로 더 친숙하기도 하다. 이날 김 의원이 밝힌 가족사와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살아온 삶의 여정을 요약 정리한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그랬듯이 저희 가족들도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부지 시절부터 돈을 벌어야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1967년 동아방송 성우로 방송 일을 시작하여 중견배우로 활동하면서 이 꿈을 어느 정도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어느 날 저에게 찾아온 조선족 한 사람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김좌진 장군의 직계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존경을 표하고, 후손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그를 따라 중국으로 간 저는 비로소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대중적 인기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늘 공허했던 까닭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할아버지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완성하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후세에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기상과 개인의 삶을 조국광복에 바쳤던 고난의 세월이 오롯이 담겨있는 역사 현장을 마음 속 깊이 담아온 저는 서둘러 사단법인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98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저는 방송활동보다는 중국 동북3성 일대를 안방처럼 드나들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동지들의 무장독립투쟁사를 양지로 끌어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나라와 문화적 관습과 행정절차가 다른 중국에서 이 일을 하려니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동상을 세우는 일도 마오쩌둥(모택동) 동상 외에는 어떤 동상도 세울 수 없다는 중국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중국 땅에 김좌진 장군의 거주지와 순국 장소를 복원하는 일을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일대는 백야 김좌진 장군이 항일 무장투쟁과 애국계몽, 교육운동을 전개했던 지역이며, 이 일대에 살고 있는 20여만 명의 중국동포들은 대부분이 항일 독립선열들의 후손입니다. 이들은 지금도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고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꼭 해내야겠다.'는 각오로 집까지 팔며 항일투쟁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전력을 기울이다보니 국가보훈처에서 도움을 주어 해림시에 한중우의공원(韓中友誼公園)을 건립할 수 있었습니다.


공원에는 역사문화관을 건립해 구한말 우리 동포의 이주시기부터 항일무장독립투쟁, ·중 양국의 항일운동, 한류문화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수원을 세워 국내 초··고 학생들과 일반인들의 역사탐방을 돕고 있습니다. 이로써 중국인은 물론 우리 동포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류 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흔히 김좌진 장군이라고 하면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항일무장투쟁만 생각하는데 당시 독립군들은 주둔지마다 학교를 세워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교육을 하였습니다. 그 중 아직 남아 있는 학교가 해림시 조선족실험소학교입니다. 특히 이 학교 예술단은 중국 56개 소수민족 연기연예부분 경진대회에 나가서 항상 1등을 차지하는 우수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학교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한국문화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2001년부터 여름방학이면 청산리역사대장정대대학생 원정대를 구성해 북만주 일대 1만 리 길의 항일독립투쟁 전적지와 고구려, 발해 유적지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재를 털어 이 일을 하느라 월세 집으로까지 옮기며 경비 마련에 아등바등하자 아들 송일국은 엄마를 돕겠다며 직접 학생들을 데리고 청산리역사대장정대에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은 드라마 해신의 주역을 맡아 경비 마련에 도움을 주었고, 학생들을 데리고 졸본성에 올라 고구려 기상을 펼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자 드라마 주몽에서 주인공을 맡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은덕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은덕은 뒤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가 연기자 생활에 안주하고 살았더라면 절대 올 수 없는 국회 비례대표 의원직까지 제안 받은 것입니다. 저는 국회의원이라는 명예보다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를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이를 수락하여 18대 국회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리고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송파 병 지역구로 출마하였습니다. 송파 병은 제 소속 정당에서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했던 지역입니다. 보좌관에게 물으니 그 지역에 아는 사람은 두세 명밖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선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선하였습니다. 제 소속 정당에서 여덟 명의 여성후보가 출마해 오직 저 혼자 살아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선거 한 달을 남겨두고 삼둥이 손자까지 태어났으니 이야말로 겹경사였습니다. 삼둥이가 태어나자마자 저는 망설임 없이 대한이, 민국이, 만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한 달 뒤 저는 당선 확정 순간에 지지자들과 함께 대한민국만세를 불렀으며, 소속 정당에서 유일한 여성 지역구 의원이라 재선임에도 최고위원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저는 행복한 삼둥이 할머니입니다. 어딜 가든 국회의원 김을동이 아니라 삼둥이 할머니로 불리니 말입니다. 삼둥이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어느 자리에서나 아이답지 않은 예절 바른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둥이가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존중과 배려의 힘입니다. 저는 자식들을 키우며 야단쳐 본 기억이 없습니다. 자라며 말썽을 부릴 때가 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저는 오직 사랑으로 감싸고, 자식들의 생각을 존중하며 배려해주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존중과 배려를 생활화해야 밖에 나가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아들 일국이는 결혼을 앞두고 며느리와 이런 서약을 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존칭어를 사용하며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 서약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것이 삼둥이입니다.


오늘 제가 누리고 있는 모든 행복은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은덕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버지 김두한 의원도 공()을 위해 사()를 버리신 분이기에 저희 가족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할아버지와 동지들의 거룩한 뜻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일을 꾸준히 하자 이런저런 복들이 굴러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조상의 은덕을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먼저 조상을 기리고, 가족 상호간에 존중하고 배려하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상호존중과 배려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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