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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4-22 19: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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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존배 희망포럼과 총회 등 주요 행사 때면 언제나 남들보다 먼저 행사장에 도착하여 회원들을 격려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노신사 한분이 있다. 2011년 상존배 운동본부 출범 당시부터 고문으로 참여하여 상존배 운동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김명렬 고문이다.


 


28살의 전국 최연소 면장


김 고문은 경남 합천 출신이다. 합천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유명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시로 올곧은 상소를 올리며 선비의 기개를 떨쳤던 남명 조식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국태민안의 충절이 서려있는 합천의 정기는 김 고문에게서도 물씬 느껴진다.


본관이 의성인 김 고문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삼절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의 집안이다. 유학자의 꼿꼿한 삶을 살았던 심산은 일제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하며 투옥을 거듭하다가 왜관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이후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독재 권력에 분연히 맞섰으며, 성균관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냈다. 이러한 집안 내력이 말해주듯 김 고문의 고향 합천군 용주면 면장은 열에 일곱이 김 고문의 집안사람이었다고 한다. 김 고문도 불과 28살에 고향 면장을 지냈다. 옛날 면장은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른의 자리였는데 전국 최연소 면장으로 6년 동안이나 재임했다는 것은 김 고문의 인품과 능력이 나이를 뛰어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 김 고문의 열정과 꿈을 발산하기에 고향은 무대가 좁았다. 그래서 면장 업무를 보면서도 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 설립에 앞장섰고, 이후에는 기능올림픽 공예분과 심사위원을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면장 직을 내려놓고는 경남 완초(莞草 왕골 돗자리)협동조합 조합장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온 것이 1971년이다.


사업가의 길을 걷다


서울에 와서 시작한 사업은 갈포벽지였다. 갈포벽지는 원래 삶은 칡덩굴 껍질로 만드는데, 왕골이나 대마, 갈대 등 다년생 식물을 가공하여 직조한 후 바탕지에 붙여 자연스러운 색상과 질감을 표현한다. 실내 온도조절과 방음효과가 있어 주택의 거실, 사무실, 영업장 등의 벽에 많이 쓰인다. 그런데 갈포벽지를 사업화하려니 직조기를 살 수가 없었다. 직조기는 이 사업의 핵심기술이었기에 누구도 이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 고문은 자신의 눈썰미와 손재주만을 믿고 직접 직조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기어코 성공하였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사업에 자신이 붙은 김 고문은 우연한 기회에 터널방수기술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함께 전국 곳곳에서 토목공사가 벌어지는데 터널공사를 마무리 짓는 방수는 대부분 외국기술에 의존하고 있던 시기였다. 물론 이 분야는 김 고문의 전공이 아니어서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김 고문의 열정과 집념은 터널방수기술 국산화를 성공시켰다. 20048월 착공하여 20097월에 개통한 총 연장 61.4km의 서울춘천고속도로 구간 터널 41개도 모두 김 고문의 합동에너지()에서 방수공사를 맡아 완벽하게 시공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사업이 그렇듯 김 고문도 순탄한 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60대 후반 나이에 어렵게 개발하고 특허까지 받은 터널방수기술을 경쟁사에서 끈질기게 음해하여 사기꾼으로 몰리는 억울함도 겪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공장 기숙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숙식하며 모든 인생을 걸고 개발한 기술이 사장될 위기를 겪자 김 고문은 분노와 좌절감에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공장 가까이 있는 아미동 성당에 나가 무조건 기도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기에 기도하는 방법도 몰랐지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이 개발한 터널방수공사기술로 불필요한 외화낭비를 막게 도와달라는 간절한 소망, 그리고 모함하는 자들에 대한 원망과 용서의 방법이 있는가를 갈구하는 진정성 하나로 신께 매달렸다. 그렇게 하기를 두어 달 지난 어느 날 김 고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증오와 살기가 사라지고 평화로움이 깃들고 있음을 보았다. 이때부터 김 고문은 신앙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다섯 번째 성경 필사


김 고문이 천주교 영세를 받은 것은 69살 늦은 나이였다. 천주교 영세를 받으려면 수개월의 교리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때 김 고문은 성경 필사를 시작하였다. 4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대학노트에 일일이 필사하다 보니 복음 말씀에 대한 감동이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감동을 우선 가족에게 전하고자 네 명의 자녀를 위해 신구약성서를 네 번씩 필사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필사를 위해서는 잠을 줄여야 했다. 그래서 김 고문은 가능하면 저녁 일정을 잡지 않고 일찍 귀가하여 잠자리에 든 다음 새벽 1시 이전에 일어나 아침 출근 때까지 필사를 하였다. 그렇게 해도 필사 한번을 마치려면 일 년 이상이 걸렸다.


성령의 빛으로 제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시게 하시고, 저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이는 필사 전에 김 고문이 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필사를 마치면 마침기도를 하고 출근준비를 한다.


당신의 말씀은 제 발등의 불이요, 저의 길의 빛이옵니다.”


김 고문은 성서에 있는 말씀의 빛을 따라 살아가며 행복을 누리기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어오르는 필사의 고통을 기도로 이겨내고 있다. 그렇기에 얼마 전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60억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사기당하고도 필사하며 기도하며 평정심을 지키고 있다.


침까지 맞아가며 네 차례 필사를 모두 마쳤지만 다시 다섯 번째 필사를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육군소장인 큰 아들의 무운장구를 기도하며 필사한다고 한다. 큰아들은 원래 서울공대 진학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전국 최상위권 성적이었기에 모두가 당연히 그러리라고 여길 때 김 고문은 아들을 육사교수부장에게 보내 사관학교 진학으로 마음을 바꾸도록 하였기에 큰아들이 더 큰 꿈을 이루어야 마음의 빚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 고문의 부인은 큰아들의 사관학교 진학을 끝까지 반대하였고, 김 고문에게 대학 등록금 아까워 사관학교 보냈다는 원망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제는 원망의 마음이 풀렸지만 목 디스크가 허리로까지 내려와 투병 중이라며 김 고문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은 묘한 것이어서 아들이 대위 시절 면회를 갔다가 연대장이던 정두근 총재를 만나 그의 인품에 반해 지금까지 상존배 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상존배 정신은 평소 김 고문의 생활철학이기도 하기에 그는 상존배 운동의 성공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진작부터 몸에 배인 상존배 정신


김 고문은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 집안의 후손답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외딴 길에 고장차가 서 있으면 도와주어야 하고, 옛날 부부가 함께 연탄 리어카를 끌고 밀며 비탈길을 오르고 있으면 쫓아가서 밀어주어야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중요한 모임에 참석하느라 정장 차람이라 할지라도 리어카를 밀어주고 감사 인사를 하는 부부의 손을 잡아주다 보면 옷이 더럽혀지지만 그 더러움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꼈다고 하니 김 고문이야말로 뼛속 깊숙이 상존배 정신이 새겨져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성품에 사업도 성공하자 김 고문은 2년 임기인 의성 김씨 대종회 회장을 여섯 차례나 연임하며 서울 강서구청 맞은편에 대종회 회관을 건립하였고, 장학재단 설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서강대학교에 10억 원을 출연하여 장학회를 만들었다. 서강대에서는 김 고문의 호 지경(志敬)을 따서 지경장학회를 만들어 매년 한두 차례씩 장학금 수여를 하고 있다. 지난 41일에는 학부생과 대학원생 비율을 7:3으로 하여 50명에게 제20회 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대학에서도 김 고문의 소중한 뜻을 받들어 장학회를 잘 운영해 학부생에게는 250만원, 대학원생에게는 3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의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리고 지경장학회의 특징은 되돌림장학회라는 것이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졸업 후 취업을 하면 의무는 아니지만 장학회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도록 권해 더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도록 함으로써 도움을 받은 자가 다시 사회에 이바지하는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킨 장학회이다.



기부문화의 실천


이처럼 기부문화를 몸소 실천해온 김 고문이기에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상존배 가치에 적극 공감하며 후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경영 일선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한 김 고문은 자신의 뜻과 일치하는 상존배와 함께 사회봉사를 하며 삶의 보람을 찾고 싶어 했다. 그것이 바로 김 고문이 준비하고 있는 회고록 제목처럼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김 고문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 하는 개인적인 꿈은 고 이태석 신부처럼 아프리카 봉사를 하는 일이었다. 영화 울지 마 톤즈로 잘 알져진 이태석 신부는 의사의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신부가 되어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일생을 바쳤기에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린다. 김 고문이 생전의 이태석 신부를 만나 이야기 들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은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주는 일이었다. 가뭄과 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김 고문이 지금처럼 건강을 잘 지켜 그 소중한 꿈을 이루는 날 아프리카에도 상존배의 깃발이 꽂힐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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