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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7-04 20:26:35
  • 수정 2016-07-04 20: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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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성파(性坡) 스님 서예전에서 상존배 정두근 총재가 축사를 한 인연으로 정 총재와 전정자 고문, 이상범 자문위원, 채재일 사무총장은 72일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으로 성파 스님을 찾아뵈었다.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조계종 9대 종정)을 은사로 사미계 수계를 받은 성파 스님은 30여 년 전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고 현재 통도사 서운암 선방에서 불화·민화·도예·천연염색·전통장담그기·시조 등 다양한 전통 장르를 넘나들며 불법(佛法)을 피우고 있다. 특히 1985년부터 5년 동안 3천 불상을 직접 구운 도자삼천불을 서운암에 봉안하였고, 1991년부터 10년 동안은 해인사 팔만대장경 앞뒤 판을 분리 제작한 16만 도자대장경 불사를 완성해 통도사를 찾는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진리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는 불보(佛寶) 사찰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모신 법보(法寶) 사찰 해인사, 고려 중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이후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僧寶) 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三寶寺刹)로 불린다. 이러한 통도사 13개 암자 중 하나가 서운암이다. 통도사는 부지 700만평의 대사찰이기에 서운암 역시 암자라 하지만 면적이 20만평에 달한다.

정 총재 일행은 서운암에 도착해 성파 스님을 친견(親見)하며 삼배(三拜)의 예()를 갖추다가 새까만 방바닥에 반짝이는 점들이 박혀있음을 보았다. 스님께서 방바닥을 옻으로 검게 칠한 후 우주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또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여덟 폭 병풍의 금강산 만물상그림도 스님의 작품이었다. 가까이 보면 산봉우리 하나하나가 실제 사람의 형상으로 모자를 쓰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한 각양각색의 인물 무리가 담겨있었다. 금강산의 속성인 ()’이 우리의 자성(自性)이고, 이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결코 변하지 않건만 자성()’은 만 가지 형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니 이를 표현한 그림이라 한다. 뒤집어 말하면 금강산 봉우리들이 생긴 건 다 달라도 이라는 바탕은 하나라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혼란스러운 선문답(禪問答) 대신 일상에서 쉬운 비유를 찾아 복잡한 세상사를 단순화시키는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고 계셨다.


상존배 운동본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음에도 상존배 운동의 확산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데 따른 고충을 말씀드리고, 발전 방향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심보감 입교편(明心寶鑑 立敎篇) 15장에 나오는 구절을 들려주었다.

끽타주권타인(喫他酒勸他人) 위구우(爲九愚)

남의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아홉째 어리석음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여 천하를 평정하도록 도운 태공(太公 강태공)이 무왕에게 한 이 말은 사람에게 재앙을 불러오는 열 가지 어리석음 중 아홉 번째로 내 본심이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남에게 손해 끼치거나 남을 피곤하게 할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경구이다. 상존배를 포함해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시민운동단체를 향한 쓴 소리였다. 좀 심하게 말하면 남의 돈으로 생색내려 하지 말라는 꾸지람이기도 했다. 실제 성파 스님의 이 꾸지람은 종교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스님은 탁발하고 시주만 받는 구걸불교에서 벗어나 자립능력을 갖춤으로써 가난한 중생에게 절이 시주할 줄 아는 생산불교를 주창하면서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서운암에는 약 5천 개의 장독이 있다. 그중에는 300년 넘는 장독 수두룩하다. 옛날 장독은 순수 자연 유약을 썼기에 숨 쉬는 숨구멍이 있지만 요즘 장독은 코팅을 한 것이라 장을 담가보면 맛이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은 아파트 문화에 밀려 버려지는 독을 모아 직접 장을 담가 일반에도 판매한다. 바로 전통장의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입소문으로 널리 퍼진 서운암 된장과 고추장, 간장이다. 산비탈에 조성한 감나무 단지 역시 생산 불교를 위한 노력으로 여겨졌다.

절집에는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있다. 이판(理判)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수행하는 일을 말하며, 사판(事判)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판승이 없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절의 운영이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둘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통하는 것이고, 절집의 승려는 이판과 사판을 걸림 없이 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었다. 오늘날 이판사판이 부정적 의미로 변질된 것은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해 승려가 천하게 여겨질 때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이판이든 사판이든 인생 막장이기는 마찬가지라 여겼기 때문이다.

성파 스님은 이()와 사()를 아우르는 건 불가의 일만이 아니라 사회단체도 마찬가지임을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졌다 할지라도 경제적 자생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수명이 길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존배 역시 자생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을 고심 중이라고 말씀드리며 스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한편, 상존배 운동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면서도 이를 실천하고 생활화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어려움을 말씀드리자 스님께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은 반복교육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미리 드린 상존배 스티커를 가리키며 스티커 부착도 반복교육을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니 홍보와 교육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제아무리 올바른 정신이라도 실천하게 만들려면 반복교육뿐이다. 흔히 교육이라면 새로운 것을 주입하는 것이라 여기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교육은 기술을 가르치는 것에 머무르고 숙련공을 만드는 것은 반복교육이다. 불교의 업과도 통하는 반복은 습관화를 가져오고 문화화는 그 다음에 절로 따라온다. 문화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존배 운동에 대해 설명을 들은 스님은 기존의 윤리 도덕이 못하는 것을 하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운동이기는 하나 운동만으로는 흙먼지를 흙으로 뭉치게 하는 수준에서 더 이상의 유형화를 기대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무형을 유형화시키기 위해서는 물로써 흙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모양을 만드는 성형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형을 위해서는 반복을 통한 숙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도자기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성형은 아직 과정일 뿐이다. 성형을 하고 초벌구이를 마쳤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을 그대로 두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재벌구이이다. 온도를 높여 재벌구이를 해야 다시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숙련의 완성이다.

분초를 쪼개 쓰는 성파 스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가 쉽지 않으나 스님과 40년 넘게 교분을 쌓아온 상존배 고문 전정자 연미술 관장이 동행한 덕분에 스님은 다른 내방객들을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점심공양을 위해 산비탈 오솔길을 정 총재와 함께 걸었다.



점심상에 마주앉은 스님은 이웃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자한 미소로 음식을 권했고, 공양을 돕는 보살에 따르면 상에 놓인 김치가 서운암 땅속에서 무려 12년이나 잠자다 나온 묵은지라고 귀띔해주었다. 소박하기만 했던 밥상이 갑자기 산해진미 부럽지 않는 밥상으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점심 공양 후 스님은 수많은 장독대를 끼고 돌며 장경각으로 직접 안내했다. 통도사를 품고 있는 영축산 중턱에 넓은 터를 닦고 자리 잡은 장경각은 성파 스님 10년 노고의 결실인 16만대장경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장경각은 건물부터가 성파 스님의 작품이었다. 지붕에는 흙기와가 아닌 도자기 기와가 올려있었고, 단청은 염료를 섞은 옻칠로 신비로운 비색을 창조하였으며, 기둥에도 옻칠을 하여 은은한 기품이 풍겨 나왔다.



평소 옻에 관심이 많은 스님은 옻으로 불화를 조성해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옻칠불화전을 펼쳐 보이기도 하였다. 옻의 속성인 둔탁함을 스님이 개발한 기법에 따라 질감과 입체감까지 완벽하게 표현한 불화전을 찾은 이들은 모두가 경탄하였다. 옻은 방습, 살균, 내구성이 강하기에 옻칠 불화는 물론이고 옻칠 단청도 수백 년 변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건물 자체가 문화재급 작품인 장경각 안으로 스님을 따라 들어가니 숨이 턱 막힐 충격과 전율에 사로잡혔다. 16만 대장경 말은 들었으나 막상 눈앞에서 보니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스님의 법력이 소름끼칠 정도의 기운으로 장경각을 꽉 채우고 있었다. 해인사에 대장경 목판경이 있고, 화엄사에 석경이 있다면 서운암에는 도자경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앞뒤 판에서 일일이 뜬 탁본을 900도의 불에 초벌구이 한 도판에 실크스크린으로 떠 유약을 발라 다시 1,250도 열로 구워낸 16만 도자대장경은 성파 스님이 1991년부터 2000년까지 꼬박 10년 동안 매진해 일궈낸 대작불사이다. 공정 과정에서 유약 하나까지 직접 연구개발하고 도자기판 굽는 비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등의 숱한 난관과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성파 스님이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깊이를 혜량하기 어려운 불심과 남북통일로 국태민안과 국운상승을 이루고자 하는 염원이 워낙 간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도자기대장경은 장경각 안에 해인도(海印圖) 형태로 쌓여 있었다. 54번을 꺾어 도는 미로 해인도를 따라 가노라면 진리를 깨우친다 하는데 범인(凡人)은 그저 탄성도 삼켜야 하는 경외감에 숨소리조치 내기가 부담스러웠다. 도자기대장경은 정확히 1625백 장, 무게 총 65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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